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오카 타츠로 (문단 편집) == [[세이부 라이온즈]] 감독 시절 == [[파일:external/wing-auctions.c.yimg.jp/cal_my_style-img600x450-1444687055cg1uyd13510.jpg]] 1982년, 히로오카는 [[프런트]]로 전임한 [[네모토 리쿠오]] 감독의 후임으로 [[세이부 라이온즈]]의 감독으로 취임하게 된다. 히로오카는 세이부에서도 야쿠르트에 있을 때와 똑같이 엄격한 생활 관리와 디펜스 중시의 야구를 실행했다. 취임 1년차인 1982년, 전기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[[플레이오프]]에서[* 이 해를 끝으로 폐지되었다. 이후 2004년 지금의 [[클라이맥스 시리즈]]와 비슷한 제도로(다만 리그 우승팀에게 [[부전승]]을 주는 규칙은 후에 추가) 부활.] 후기리그 우승팀 [[닛폰햄 파이터즈]]를 3승 1패로 누르고 19년 만의 [[퍼시픽 리그]] 우승으로 이끌었다. 같은 해 [[일본 시리즈]]에서도 [[주니치 드래곤즈]]를 4승 2패로 격파, 24년 만의 [[일본 시리즈]] 우승을 달성하며 세이부의 황금 시대를 열게 된다. 이듬해인 1983년엔 2위 [[한큐 브레이브스]]와 무려 '''17경기차'''라는 말도 안되는 독주를 펼치며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. [[일본 시리즈]] 상대는 현역 시절 친정팀인 [[요미우리 자이언츠]]였는데, 당시 [[후지타 모토시]] 감독과는 한 때 팀메이트였기 때문에 이 해 일본시리즈는 '''“야구계의 맹주 자리를 건 싸움”''' 으로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. 시리즈는 7차전까지 이어지면서 혈투가 계속되었지만 결국 4승 3패로 세이부가 승리해 2년 연속 [[일본 시리즈]] 우승을 이끌었다.[* 후지타는 이 해를 끝으로 사임했다가 1989년 다시 복귀, 1992년까지 교진의 지휘를 맡았다.] 이 우승으로 히로오카는 명감독으로써 평가를 받게 된다. 시즌 종료 후엔 [[닛폰햄 파이터즈]]로부터 [[에나츠 유타카]]가 트레이드로 입단했고 에나쓰의 영입을 위해 [[중간 계투]]였던 [[기무라 히로시]], [[시바타 야스미츠]]를 방출, [[고바야시 세이지(1958)|고바야시 세이지]]도 [[히로시마 도요 카프]]에 트레이드로 이적하는 등(근데 고바야시는 원래 히로시마 출신이었다) 3명의 [[중간 계투]] 투수가 단번에 퇴단했다. 그러나 이 트레이드는 히로오카의 의향에 반했던 거라 히로오카는 구단 [[프런트]]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고, 또 에나츠는 독불 장군적인 성격, 히로오카는 엄격한 선수 관리로 유명했는지라 언론에서는 두 사람간의 갈등을 이때부터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. 1984년에는 팀의 2년 연속 [[퍼시픽 리그]] 우승과 [[일본 시리즈]] 우승을 이끌었던 [[타부치 코이치]], [[야마자키 히로유키]], [[오타 다쿠지]] 등의 주력 선수들이 연달아 부진을 겪으면서 팀은 [[우승권]]에 멀어지면서 [[페넌트레이스]] 경쟁에서 탈락했다. 그 해 5월부터 히로오카는 방침을 전환해 젊은 선수들을 다수 기용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고 이에 베테랑이었던 타부치와 야마자키는 현역 은퇴를 결심했고 에나츠도 8월 이후에 2군으로 강등되면서 등판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결국 이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. 에나츠는 히로오카에 대해 “나의 생활권을 빼앗은 남자” 라고 비난했고 결국 이 해엔 [[한큐 브레이브스]]에게 리그 우승을 내어 주고 3위로 시즌을 마쳤다.(2위는 [[롯데 오리온즈]]) 이 해 시즌 종료 후 타부치가 은퇴하면서 히로오카는 거포 타자의 보강을 위해 [[뉴욕 양키스]]에서 활약하고 있던 [[돈 베일러]]를 영입해 달라고 구단 프런트에게 요청했지만 구단은 타자가 아닌 [[대만]] 야구계의 에이스였던 [[궈타이위안]]을 영입했다. 당시 외국인 선수의 등록범위는 2명으로, 외야수 제리 화이트가 방출되어 비어있던 외국인 슬롯을 [[야수]]가 아닌 [[투수]]에게 배분한 것. 1군 등록은 '''‘[[내야수]]인 스티브 온티베로스와 [[투수]] 궈타이위안'''' 이 되었다. 이로 인해 히로오카는 구단 [[프런트]]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갖게 되었다.[* 다만 결과적으로 프론트의 판단은 정확했던 게, 궈타이위안은 10년 가까이 세이부의 우완 에이스로 맹활약하며 황금기의 주역이 된다. 그리고 돈 베일러는 성적이 조금씩 떨어지긴 했으나, 1986년까지는 그런대로 메이저리그 주전으로 활약한 터라 세이부가 영입을 추진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.] 1985년에는 리더로 부상한 [[이시게 히로미치]], [[아키야마 코지]], [[츠지 하츠히코]], [[쿠도 키미야스]], [[와타나베 히사노부]], [[이토 쓰토무]] 등의 젊은 선수들이 활약하면서 또다시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. 그러나 히로오카는 시즌 후반에 지병인 [[요산성 관절염]]으로 인해 휴양 생활을 했고 팀의 리그 우승이 결정될 당시에는 현장에 없었다. 그 후 일본 시리즈에선 현역 시절 라이벌 [[요시다 요시오]]가 이끌던 [[한신 타이거스]]에게 2승 4패로 패하면서 한신의 첫 [[일본 시리즈]] 우승의 제물이 되었고, 히로오카는 이 해를 끝으로 [[모리 마사아키]]에게 지휘봉을 넘기고 퇴임했다. 퇴임 후 히로오카는 또 다시 야구 평론가/해설가로 활약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